* 주요내용
드라마 \'궁\'은 2006년, 현재의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라는 역사적 가설로 시작한다. 황제가 중추성 현훈으로 위독해지자 황태자인 신은 태후로부터 미리 정해놓은 배필과 혼인을 치르라는 명을 받는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황당한 일이지만, 지금껏 그래왔듯. 황태자의 삶엔 개인의 선택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신은 평소 숙원이었던 창덕궁 독립과 자신의 호위를 담당하는 익위사의 규모 축소를 조건삼아 애정 없는 정략결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가족간의 사랑이 누구보다 남다른 채경의 집. 가족은 최악의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 상황에서 허풍으로만 믿었던 할아버지와 황제의 정혼 약속이 사실임에 즐거운 경악을 한다. 여고생인 채경은 갑작스런 결혼을 거부하지만, 장녀컴플렉스로 집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집안을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효녀 심청적 발상으로 이 황당한 결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한편, 신이 정략결혼을 결정하기 전, 청혼을 받았던 비밀여자친구인 효린은 꿈을 위해 당당히 청혼을 거절하는데 신은 효린의 거절을 한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처럼 궁 안의 인형으로 살게 하고 싶지 않다며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여자애랑 결혼을 하는 것이 오히려 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청혼이 장난이라 여겼던 효린은 신이 같은 학교의 평범 이하의 여고생과 정략결혼을 하게 됐다는 소식에 놀란 채, 결혼식을 앞두고 발레 콩쿨 참석 차, 해외로 출국을 하는데, 떠나는 효린과 공항에서 마주치는 율. 14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효열 황재자의 아들인 그는 남편의 황위를 되찾으려는 어머니-혜정궁의 명에 따라 급히 영구에서 귀국을 한다. 황위계승서열 2위인 율-의성군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궁은 조용한 파란을 맞게 되고 태후와 황제, 신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권력엔 사심이 없어 보이는 율을 반기는 가운데 황후는 혜정궁의 야망을 간파하고, 남편과 아들의 자리에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 등장인물 - 윤은혜(신채경), 주지훈(이신), 김정훈(이율), 송지효(민효린)
* 안압지
궁의 앞뜰로 촬영된 곳이기도 한 안압지는 신라의 궁터다. 현재는 커다란 연못과 전각3채가 복원되어 있으나 앞으로 계속 복원사업이 진행될 계획이라 한다. 안압지는 거대한 궁궐터임 에도 발견이 늦어 1980년대에 비로소 복원이 시작되었다. 안압지라는 이름도 \'오리와 기러기가 날아다니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궁궐의 본 이름이 아니다. 오래도록 폐허에 방치되어 있었기에 후대의 사람들이 이 연못만을 보고 안압지라고 불렀던 것 같다. 아직도 이 궁궐의 정확한 이름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 안압지는 또 발굴 당시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도 분명하다. 이 유물들을 국립경주박물관에 안압지관이라는 건물을 따라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안압지는 현재 복원된 상태만으로도 아름다움이 되살아나고 있다. 거대한 연못 주변을 한바퀴 도는 코스는 경주 최고의 산책코스라 할 수 있다.
* 경기전
궁의 뒤뜰로 촬영된 곳은 경기전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풍남문에서 동쪽으로 150m쯤 가면 울창한 숲속에 고색이 창연한 경기전이 나온다. 사적 제 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보물 제931호로 지정된 이성계 어진(왕의 초상화)과 유형문화재 제 16호로 지정된 조경묘가 있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조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태종 10(1410년)에 창건하였다. 이곳에 봉안한 영정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 등 전화를 피해 아산과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1614년 경기전이 중건 되어 다시 돌아왔으며 동학혁명때는 위봉산성으로 피난시켜 병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경기전에 인접한 북쪽에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공과 시조비의 위판을 봉안한 조경묘가 있다. 조경묘는 영조 47년에 창건하여 영조가 친히 위판을 썼으며 동학혁명군이 전주부성에 입성할 때 태조의 영정과 함께 위봉사의 행궁에 옮겼다가 7월에 다시 전주로 옮겨 놓았다. 이 경기전 일대는 전주 시내에 있지만 조경이 잘 꾸며져 있고 아늑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 전주를 여행할 때 이곳에 들러 가볍게 산책을 겸해 옛 역사를 돌아보기에 좋다.
* 강릉 선교장
\'선교장\'은 강원도 지역에서 가장 잘 남아있는 품위있는 사대부 가옥이다. 강릉시에 경포쪽 으로 4km쯤 떨어진 선교장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가옥을 대표하는 곳으로, 중요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타고 건넌다\'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이라 불렀는데, 선교장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선교장은 조선 영조때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 자리에 집을 지은 후,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다. 총건평 318평으로, 긴 행랑에 둘러싸인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있고 문밖에는 수백평의 연못 위에 세워진 활래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구조를 보여준다. 선교장은 건물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주거생활과 생활용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주변경관과 어우러진 풍치가 아름답다. 선교장의 사랑을 열화당이라 하며, 여기에는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권의 책, 글, 그림 등이 소장되어 있다.
* 운현궁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 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의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다 집권 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재혁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 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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